
롱블랙 프렌즈 B
어떤 물건이든, 깊이 파고들면 거대한 세계가 나옵니다. 때론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세계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기도 하죠.
리차드 밀Richard Mille이라는 시계 브랜드가 제겐 그랬습니다. 럭셔리 시계는 관심 둔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제가 이 브랜드에 눈길이 간 건, 처음엔 테니스 때문입니다.
라파엘 나달Rafael Nadal이 시합에 차고 나온 시계. 우연히 그 문구를 발견했거든요. 온 신경이 곤두설 파리 오픈과 US 오픈 결승전에 시계를 차고 나왔다니요.
더 알아보다 가격에 놀랐습니다. 나달이 찬 시계들*, 개당 가격이 105만~119만 달러입니다. 시계 하나가 13억~17억원을 오가는 겁니다.
*라파엘 나달은 리차드 밀 RM 27-03, RM 27-04, RM 27-05 등 모두 10개의 모델을 착용했다.
리차드 밀. 초럭셔리 시계 시장에서도 비싸기로 유명하더군요. 평균 시계 가격이 4억원대. 최근 페라리와 손잡고 낸 두 신제품*은 한국 판매가격이 각각 20억, 23억원대입니다. 호사가들이 ‘손목 위의 강남 아파트’로 부를 만합니다.
*RM 43-01 티타늄 버전, RM 43-01 카본 TPT® 버전.
솔직히 처음엔 불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서민은 평생 쥐어보기도 힘들 돈을 시계 하나에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게 말입니다.
그러다 궁금해졌습니다. 이 브랜드는 어떻게 이 가격을 사람들에게 설득한 걸까요.
프랑스 본사의 알렉상드르 밀Alexandre Mille 대표와 화상으로 대화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는 리차드 밀의 아들입니다. 2016년부터 경영에 참여했어요.
2시간이 넘게 이어진 대화는 유쾌했습니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제 마음속 불편함은 적잖이 감탄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Chapter 1.
좌절감이 만든 시계 브랜드
리차드 밀은 초럭셔리 시계 시장의 이단아입니다.
일단 역사가 짧습니다. 첫 제품이 나온 게 2001년. 전체 역사가 24년에 불과합니다.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럭셔리 시계 브랜드들 사이에선 그야말로 신생입니다.
그런데 기세는 무섭습니다. 2024년 스위스 고급 시계 시장 순위 6위*. 한 해에 겨우 5400개의 시계를 팔았는데, 그게 15억5000만 스위스프랑(약 2조6200억원) 어치였습니다. 바쉐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이나 브라이틀링Breitling 같은 전통의 브랜드들도 크게 뛰어넘었어요.
*모건스탠리와 룩스컨설트의 보고서, <스위스 시계 50대 브랜드 2024>.
이 독특한 브랜드, 도대체 어떻게 시작된 걸까요.
창업자 리차드 밀Richard Mille은 나이 쉰에 이 브랜드를 세웠습니다. 그는 프랑스 남부 작은 도시 드라귀냥Draguignan 출신이에요. 시계 회사 수출 담당 매니저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죠. 이후 평생 시계를 팔았습니다. 창업 전까지 프랑스 보석상 모부생Mauboussin의 시계 부문 대표였고요.
그는 정말 시계를 사랑했대요. 모부생에선 시계 개발을 지휘하기도 했죠. 그런데 성에 차는 제품을 만들 수가 없었다고 해요. 아들 알렉상드르 밀은 “아버지는 좌절감 때문에 창업에 나섰다”고 말했어요.
Q. 어떤 좌절감이었나요.
“사업이란 게 늘 어느 선에선 타협이 필요하잖아요. 연구개발비를 무한정으로 쓸 수도 없고, 제품 가격도 무한정 올릴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어느 선에선 개발을 멈춰야 했던 거예요. 더 좋은 시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요. 아버지는 그 점에 좌절하셨어요. 더 완벽한 시계를 만들고 싶어 하셨죠.”
Q. 리차드 밀은 어떤 시계를 그렇게 만들고 싶었을까요.
“아버지는 ‘사람들이 꿈꾸는 시계란 무엇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셨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다는 게 아니에요. 창조란 건 원래 ‘수요’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상상’에서 출발하니까요.
아버지는 자신의 취향을 모두 담은 시계를 꿈꿨어요. 아주 편할 것, 놀랍도록 가벼울 것, 엄청나게 튼튼하고 극한의 조건을 견딜 수 있을 것. 이 모든 것을 구현하기 위해 기존에 없던 소재와 공법을 적용할 것.”
Q. 기존에 없던 소재와 공법. 그런 시계를 만들다 보면 가격이 너무 올라가잖아요. 그걸 살 사람이 있다는 건 어떻게 확신했을까요?
“아버지는 평생 시계 업계에서 일하셨으니까요. 고객을 아셨죠. 타협하지 않은 제품을 만들면 그걸 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거예요. 사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살 필요도 없었어요. 우리가 처음 내놓은 모델은 딱 17점만 생산했어요. 그 정도만 팔리면 되는 거였죠.”
Q. 그런데 팔리지 않으면요? 리차드 밀은 이런 리스크를 감수할 정도로 부자였나요?
“전혀요. 이 창업은 아버지에게도 큰 도전이었어요. 안정적인 직장을 내려놓고 막대한 연구개발 비용을 써야 했으니까요. 아버지는 생활비와 개발비를 벌기 위해서 다른 시계 브랜드 컨설팅을 하셨어요. 첫 번째 모델을 내놓을 땐 ‘이게 잘못되면, 두 번째 모델은 없다’고 하셨고요. 우리는 한동안 그랬어요. 매번 새로운 모델을 낼 때마다 ‘이 모델이 안 팔리면 다음 모델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며 움직였죠.”

Chapter 2.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 기술에 베팅하다
마지막을 각오하고 출시한, 첫 제품 RM 001 투르비용. 2001년 바젤월드*에서 소개된 이 제품은 큰 화제를 불러일으킵니다.
*바젤월드 시계·보석 박람회Basel World Watch and Jewellery Show.
우선 생김새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RM 001은 리차드 밀의 상징 같은 토노tonneau* 케이스를 탑재했습니다. 사람들이 놀랐던 건, 케이스 전체가 위아래로 완만한 곡선을 그린다는 겁니다. 사람의 손목이 살짝 둥근 것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시계를 차면 손목에 착 감깁니다.
*프랑스어로 통barrel이란 뜻이다. 나무로 만든 와인 통 같은 타원형 원통을 가리킨다.
소재도 화제가 됐습니다. 리차드 밀은 이 시계에 항공우주 등급의 티타늄과 우주선이나 인공위성, 레이싱카에 쓰이는 소재*를 적용했어요. 덕분에 이 시계의 무게는 스트랩을 포함해도 40g에 불과했어요.
*Carbon Thin Ply Technology, 즉 매우 얇은 탄소 섬유층(ply)을 겹겹이 쌓아 만든 고성능 복합소재를 뜻한다.
공개 당시 리차드 밀은 “이 제품을 단 17개만 생산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시계 하나의 가격은 13만5000 달러(약 2억원). 수백 건의 주문이 몰렸습니다.

Q. 처음 RM 001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가장 놀란 지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람들이 놀랐던 건 우리의 노력이었어요. ‘시계를 가볍고 강하게 만들기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했다고?’라는 점이 기존의 생각 범위를 완전히 뛰어넘은 거죠.”
Q. 예를 들면요.
“RM 001은 토크 인디케이터를 처음으로 탑재한 시계예요. 시계의 태엽이 너무 느슨하거나 빡빡하게 감겨있지는 않은지를 측정하는 장치죠. 이 장치가 있으면 오랜 기간, 정확하게 시간을 측정할 수 있어요.
사람들은 또 저희가 직접 스플라인 나사spline screw를 만들었다는 데도 놀랐어요. 5등급 티타늄으로 만든 이 나사는 홈이 별 모양으로 나 있어요. 반복적으로 조립하고 분해해도 나사 머리가 상하지 않고, 일정한 장력으로 조일 수가 있죠. 저희는 시계 전체에 이 나사를 써요. 이 나사는 1㎏의 가격이 한화 240억원대에 달해요.”
Q. 당시 럭셔리 시계 브랜드들은 티타늄 같은 고기능 소재를 잘 쓰지 않았는데요.
“맞아요. 아버지는 그런 남다른 생각을 잘하셨어요. 당시만 해도 ‘럭셔리 시계는 응당 묵직하게 마련’이라는 인식이 있었어요. 플래티넘이나 금, 다이아몬드 같은 소재를 주로 썼으니까요. 럭셔리 시계를 차고 굳이 테니스나 골프를 치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고요.
하지만 아버지는 최고의 시계는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착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려면 정말 가볍고, 충격에 강해야 했죠.”
Q. 아무리 혁신적이었다고 해도, 2억원에 가까운 가격이 당시에 설득력이 있었나요. 리차드 밀이란 브랜드를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요.
“아버지는 탁월한 마케터였어요. 이 모델을 처음 공개하던 바젤월드에서, 아버지는 이 시계를 바닥과 벽에 집어 던지셨어요. 얼마나 충격과 저항에 강한지 보여주셨던 거죠.”

Chapter 3.
꿈에 공감하는 사람을 만들어라
압도적으로 가볍고 강한 시계.
리차드 밀은 그 탁월성을 알리기 위해 운동선수들과 손잡았습니다. 극한의 긴장감 속에서 경기를 치르는 선수들의 손목에 리차드 밀을 채운 거예요.
대표적인 인물이 테니스 황제 라파엘 나달입니다. 전설적인 포뮬러원F1 드라이버 펠리페 마사Felipe Massa, 전 축구 선수 디디에 드록바Didier Drogba, 여성 육상 100m 세계 기록 보유자 프레이저 프라이스Fraser-Pryce도 리차드 밀의 시계를 찼죠.
특이한 건, 리차드 밀이 이들을 파트너partner로 부른다는 겁니다.
Q. 왜 광고 모델이나 홍보 대사가 아닌, 파트너라고 부르나요.
“실제로 협력해 제품을 개발하니까요. 파트너들은 우리 시계가 원래 생각한 대로 움직이는지를 현장에서 테스트합니다. 정말로 충격에 강한지, 고도로 집중하는 순간에 방해가 되지 않는지를요. 이들의 피드백은 다음 시계를 개발할 때 반영돼요. 한번 관계를 맺으면 영원히 이어지곤 하죠.”
라파엘 나달은 실제로 리차드 밀과 지금까지 10개의 시계를 함께 개발했어요. 2013년 이후 주요 대회에 리차드 밀을 차고 출전하곤 했죠.
Q. 이렇게 많은 파트너를 모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 같아요.
“그게 아버지가 가장 탁월한 점이었어요. 아버지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법을 알고 계세요. 아버지가 만들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진실되게 전달하니까요. 리차드 밀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진심에 이끌린 거라고 생각해요.”
Q. 진정성을 전하는 비결은 뭘까요.
“진짜로 꿈을 꾸는 거요. 아버지는 2000년에 회사를 설립할 때 이미 2025년에는 어떤 시계를 만들고 싶은지를 이야기하셨어요. 그리고 지금 나오는 시계들은 아버지의 그 꿈을 그대로 담고 있어요.”
Q. 꿈을 실현해나가는 과정엔 엄청난 난관들이 많을 텐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함께 만드는 사람들이 다 같은 꿈을 꾸고 있으면 가능해요. 제가 2016년에 회사에 합류했을 때 그걸 느꼈죠. 전 원래 영화감독 지망생이었고, 시계를 전혀 몰랐어요.
하지만 제게 시계에 대해 알려주는 회사 사람들은 모두가 눈이 빛났어요. 신나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처럼, 자랑스럽게 우리 시계에 대해 설명했죠. 이들은 더 이상 직원이 아니라 가족 같은 존재예요. 우리의 파트너들도 마찬가지고요.”

Chapter 4.
고객의 기다림이 아니라, ‘제품의 완성도’를 걱정하라
리차드 밀은 희소성 전략으로 유명합니다.
지금은 세계 어느 매장을 가도 리차드 밀의 시계를 바로 살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현찰로 수십억원을 가져가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모델은 1, 2년을 기다려야 손에 쥘 수 있어요.
이런 희소성은 리차드 밀의 가치를 더욱 올립니다. 중고 시장에서 리차드 밀은 심지어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됩니다.
희소성이 럭셔리 업계의 기본 전략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리차드 밀만큼 이 전략을 과감하게 쓰는 브랜드는 드뭅니다.
Q. 혹시 고객을 일부러 기다리게 하는 건가요.
“물론 고객을 기다리게 만드는 게 우리의 목표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산 속도를 조정하는 건 사실이에요. 우리는 인기 모델을 계속 찍어내듯이 생산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만들고 나면 ‘이제 이 모델을 그만 만들고 새로운 것을 개발하자’ 하고 결정을 내립니다.”
Q. 왜인가요. 인기 모델을 기다리는 고객들이 많을 텐데, 우선 그런 모델을 많이 만들면 되지 않나요.
“어떤 브랜드나 그런 유혹에 빠질 거예요. 성공한 제품을 반복 생산하면 속도가 붙고 당장은 더 많은 매출을 올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일이 우리의 창의성을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계 장인들에겐 창의적인 리듬이 필요해요. 계속해서 같은 모델만 만들면 이들은 열정을 잃습니다. 혁신이 중단될 거예요.”
Q. 제품을 받기 위해 1년 이상을 기다리는걸, 대부분의 고객이 납득하나요.
“그렇게 기다려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 보통 이해하십니다. 우리 시계는 무브먼트* 피니싱 작업에만 최소 100시간 정도가 걸립니다. 시계 하나가 아니라 무브먼트 하나를 마감하는 데 그런 시간이 걸리는 거예요.
그리고 저희는 기다림 끝에 제품을 받는 분들이 보통, 제품에 대해 더 많은 애정을 가지신다는 걸 알고 있어요. 1년을 기다리는 동안, 정말 이 시계를 갖고 싶으셨던 건지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으니까요.”
*무브먼트(movement)는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바늘이 돌아가는 기계 장치 전체를 가리킨다.
Q. 그렇게 기다리다가 시계를 사려는 마음이 사라질 수도 있지 않나요.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꼭 우리 시계가 필요한 분만 시계를 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해요.”
Q. 새로운 모델을 내놓는 내부의 타임라인이 있나요.
“우리는 한해에 25개의 새로운 디자인을 시험 제작합니다. 그리고 그중 일부 모델을 선별해서 생산해요.”

Chapter 5.
럭셔리는 ‘비현실적인 꿈’을 꿀 때 나아간다
리차드 밀은 최근 페라리와 함께 만든 두 제품을 선보였습니다. RM 43-01 투르비용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Tourbillon Split-Seconds Chronograph. 티타늄과 카본 TPT® 소재 케이스로 각각 75점씩만 생산됩니다.
‘스플릿 세컨즈’. 리차드 밀이 선보인 기능 중에서도 가장 기술 난이도가 높습니다. 두 개의 초침이 독립적으로 돌아가며 기록을 잽니다. 페라리의 F1 레이서들은 이 시계 하나로 피트 스톱Pit Stop 시간*과 랩 타임Lap Time**을 각각 잴 수 있는 겁니다. 리차드 밀은 이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오데마 피게***의 기술 연구소 격인 오데마 피게 르 로끌Audemars Piguet Le Locle과 손을 잡았습니다. 600개 넘는 부품으로 정교한 장치를 완성했죠.
*Pit Stop Time : 자동차 경주 중 타이어를 갈아끼거나 연료를 보충하는 시간. 성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F1에선 보통 타이어 교체를 2, 3초 안에 끝내는 게 기본이다.
**Lap Time : 트랙 한 바퀴를 도는 데 걸린 시간.
***오데마 피게Audemars Piguet는 1875년 설립된 스위스 고급 시계 브랜드로, 복잡한 기계식 무브먼트 제작 기술과 로열 오크 모델로 유명하다.
리차드 밀과 페라리가 협업을 시작한 건 2021년. 두 차례의 협업은 모두 ‘한계를 넘어선 기술’로 이어졌어요.
2022년 선보인 첫 협업 모델 ‘RM UP-01 페라리’는 역사상 가장 얇은 시계였습니다. 이 시계의 두께는 단 1.75㎜. 고무 소재의 스트랩을 포함해도 무게는 30g에 불과했죠.
이 시계를 위해 리차드 밀은 기존 설계를 완전히 뒤엎었습니다. 모든 부품을 수평적으로 배치한 무브먼트를 탑재했어요. 크라운*을 시계 측면이 아닌 전면 디스크 형태로 배치했고요. 시계 업계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설계였어요.
*기계식 시계에서 태엽을 감는 데 쓰는 버튼.
물론 혁신에는 돈이 듭니다. 페라리와 선보인 협업 모델들은 모두 개당 가격이 20억~30억원 선입니다.
Q. 리차드 밀의 신제품은 갈수록 비싸지는 느낌입니다. 20억원이 넘는 가격을 매길 때 ‘안 팔리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은 없나요.
“솔직히 말하면 우리도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격을 산정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공정성fairness이에요. ‘이 가격이 정당한가’라는 질문입니다.
어떤 시계는 실제 근무 일수를 기준으로 5년에 걸쳐 개발됩니다. 시도된 적이 없는 기술을 위해 리스크를 감수하죠. 열 개를 만들면 여섯 개 정도를 미세 결함으로 폐기하기도 하고요. 이런 노력을 생각하면 시계 가격을 낮추기가 어려워요.”
Q. 가장 저렴한 모델도 2억원대인데요, 샤넬의 립스틱처럼 엔트리 레벨entry level*의 제품을 만들 계획은 없나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엔트리 라인이라는 건, 가격대를 염두에 두고 만든 제품을 가리키잖아요. 우리는 제품을 개발할 때 가격을 먼저 고려해 본 적이 없습니다.”
*럭셔리 브랜드에 발을 들이기 좋은 입문자용 제품. 카드 지갑처럼 작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제품이 주로 해당한다.
Q. 그럼 가격은 언제, 어떻게 결정되나요.
“우리가 가격을 생각하는 순간은, 제품이 생산 라인을 빠져나온 직후예요. 그제야 우리가 그 제품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는지를 계산하죠. 그걸 바탕으로 가격이 산정됩니다.
그러니까 한 번도 ‘이 정도 가격대의 제품을 만들어 보자’라고 접근해 본 적이 없는 거예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리차드 밀은 처음부터 가격 때문에 퀄리티를 타협하고 싶지 않아서 탄생한 브랜드니까요.”
Q. 리차드 밀에 있어 시계란 무엇인가요. 더 이상 우리는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시계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시계가 캔버스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우리를 표현하고, 우리가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미디어니까요.”
Q. 많은 사람들이 럭셔리 브랜드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이 필요하다고 말하곤 합니다. 리차드 밀은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지 않나요?
“맞아요. 저희는 그런 질문을 받곤 하죠. 하지만 저희가 생각하는 럭셔리의 정의는 달라요. 자유로움을 추구하고, 완성도에 있어 타협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시계를 ‘상품’으로 보지 않아요. 수익성을 넘어 자유로운 창조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예술 작품과 유사한 점이 있죠.”
Q. 상품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타협하지 않는다… 조금 비현실적인 이상을 밀고 나가는 것이군요.
“맞아요. 그게 가능한 건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죠. 생각해 보세요. 2000개가 넘는 부품 중 하나라도 의도한 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시계가 완성되지 않아요. 모두가 타협하지 않고 극강의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이 시계가 만들어지죠. 리차드 밀은 완벽함을 추구하기로 한 사람들, 그들의 협력과 몰입이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증명하고 있어요.”


롱블랙 프렌즈 B
저는 선입견을 가지지 않겠다고 결심한 적이 있습니다. 특히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단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열정이, 누군가에겐 인생을 걸 만큼 중요한 것일 수 있으니까요.
처음에 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시계 브랜드가 제게 진정성과 몰입이라는 키워드를 가르쳐주듯이 말입니다.
롱블랙 피플, 리차드 밀이라는 브랜드가 조금 더 궁금하신가요. 청담동의 리차드 밀 플래그십 스토어를 한번 방문해 보시길 권합니다. 가보니 편안하고 따뜻한 공간이더군요. 선뜻 살 수는 없지만 감탄을 자아내는 물건을 감상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요.